[긴급진단] 발사르탄 판금조치 파장 확산...원료 변경·시장판도 변화 촉각
제지앙화하이 원료 사용한 발사르탄 의약품 38% 판매중지...회수는 검토
중국 기업 제지앙화하이가 생산한 고혈압치료제 '발사르탄'에 발암 가능 불순물이 검출됐다는 소식에 국내 제약업계가 긴장감에 휩싸였다. 아직 유해성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국내 허가받은 발사르탄 함유 의약품 중 40% 가량이 판매중지될 정도로 대규모 조치다.
선제적으로 219개 품목의 판매가 잠정 중단됐지만 향후 조사 결과에 따라 회수 가능성도 제기된다. 제지앙화하이가 생산한 다른 원료의약품에서도 문제가 발견되면 제약업계 전체로 악재가 확산될 수 있다는 불안감도 감지된다. 향후 제약업체들의 원료의약품 교체 움직임이 활발할 것으로 예상되며 고혈압치료제 시장의 판도 변화도 전망된다.
▲식약처, 219개 품목 판매중지...국내 허가 발사르탄 의약품 38% 해당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 7일 중국 제지앙화하이 제조 발사르탄 원료를 사용한 82개사 219개 품목에 대해 판매중지와 제조중지 조치를 내렸다. 제지앙화하이가 제조한 발사르탄 원료의약품도 잠정 수입중지와 판매중지 조치를 받았다.
▲잠정 수입중지 및 판매중지 원료의약품 목록(자료: 식품의약품안전처)
유럽의약품안전청(EMA)이 제지앙화하이가 제조한 발사르탄에서 불순물로 ‘N-니트로소디메틸아민(NDMA)’이 확인돼 해당 원료를 사용한 제품에 대해 회수를 발표한 데 따른 조치다. 독일,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헝가리,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아일랜드, 불가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벨기에, 프랑스, 폴란드, 크로아티아, 리투아니아, 그리스, 캐나다,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바레인, 몰타 등 유럽 22개국에서 해당 제품의 회수를 결정했다.
NDMA는 세계보건기구(WHO) 국제 암연구소에서 2A(인간에게 발암물질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물질)로 분류된 유기화학물질이다. 2A는 동물의 발암성에 대한 근거는 충분하지만 사람에게 암을 일으키는 증거가 불충분한 단계를 의미한다.
동물실험 결과 NDMA는 간, 신장, 호흡기계 등에 암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일정량을 초과할 경우 사람에게도 잠재적인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알려졌다. 미국보건사회복지부(HHS)는 고농도 NDMA에 노출 시 간손상과 암을 발생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적시한다.
식약처 관계자는 문제의 원료가 함유된 약물의 유해성에 대해 "발진, 가려움질, 구역질, 어지럼증 등 고혈압약의 일반적인 부작용이 보고되었을 뿐 특이한 사항은 없었다"면서 "현재 불순물의 원인, 함유량, 인체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국내‧외 정보를 다각적으로 수집하고 분석 중에 있다"라고 설명했다.
식약처에 따르면 국내에서 시판허가를 받은 발사르탄 함유 의약품은 총 573개 품목이다. 허가받은 제품의 38%가 판매중지되는 대규모 조치가 단행된 것이다.
최근 3년간 전체 발사르탄 총 제조·수입량은 48만4682kg(제조 36만8169kg, 수입 11만6513kg)이며, 제지앙화하이가 제조한 발사르탄은 1만3770kg으로 전체 제조·수입량의 2.8%에 해당한다.
특히 지난 3년간 국내 수입된 발사르탄 수입량의 11.8%를 제지앙화하이가 차지할 정도로 높은 수입 비중을 보이면서 판매중지 대상도 많아졌다.
하나의 사건으로 200개 이상의 의약품이 판매가 중단되는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들다. 지난 2009년 석면탤크 파동 당시 1122개 품목에 대해 판매금지와 회수조치가 내려진 것이 역대 가장 많은 제품에 대한 처분으로 기록됐다.
국내에서 판매·제조중지 명령을 받은 발사르탄 함유 219개 품목은 제지앙화하이의 원료의약품을 사용한다고 허가증에 등록된 제품이다. 제약사가 원활한 원료의약품의 수급을 위해 2개 이상의 원료를 등록하는 경우도 많아 219개 제품 중 일부는 제지앙화하이의 원료를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생산실적이 없어 시중에 유통되지 않은 제품도 많을 것으로 식약처는 관측했다.
식약처 관계자는 "유럽에서의 조치로 제지앙화하이의 원료가 등록된 제품에 대해 선제적으로 판매중지 결정을 내렸다"면서 "이들 제품이 문제의 원료를 사용했는지, 유해성이 있는지는 추가로 조사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회수 명령을 내리지 않은 이유는 판매중지 조치를 받은 의약품 중 제지앙화하이 원료를 사용하지 않은 제품도 있을 뿐더러 유해성 여부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유럽에서는 제지앙화하이 제조 발사르탄에 NDMA가 확인됐지만 국내에 공급된 원료에 NDMA가 검출됐는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유럽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현재까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은 상태다. 미국식품의약품국(FDA)의 샌디 월시(Sandy Walsh) 대변인은 "이번 사태에 대해 인지하고 있지만 언급할 내용은 없다. 약무당국 차원에서 안전성 문제가 확인될 경우 국민들에게 즉각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전했다.
▲제지앙 화하이 파마슈티컬즈의 API 공급 현황(출처: 제지앙 화하이 파마슈티컬즈 홈페이지)
▲최악의 경우 제지앙화하이 다른 원료 불똥 가능성...제2의 탤크사태 우려
식약처는 판매중지 제품과 원료의약품에 대한 유해성 여부를 점검한 이후 후속조치를 진행할 방침이다.
만약 제지앙화하이가 제조했더라도 국내 수입된 물량에서 NDMA가 검출되지 않으면 안전하다고 판단, 판매중지와 제조중지 조치가 해제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상당 물량은 완제의약품 제조에 사용돼 수입 원료의약품에 대한 안전성을 단정짓기는 어려워 보인다.
완제의약품에서 NDMA의 검출 여부를 확인한 이후 후속조치를 결정할 수 있지만 완제의약품의 유해성 여부는 후속조치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전망이다.
공교롭게도 9년 전 국내에서 유사한 사례가 발생한 적이 있다.
지난 2009년 식약처는 발암물질인 석면이 함유된 '탤크' 원료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1122개 품목에 대해 판매금지와 회수 명령을 내렸다. 이 때 탤크 원료가 극미량 들어간 완제의약품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과학적 판단도 없었고, 완제의약품에서 석면 검출 여부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식약처는 '소비자 불안 해소'를 명분으로 대규모 행정처분을 단행했다.
석면탤크 처분에 대해서는 법원에서 적법성을 인정받았다. 석면탤크 파동 행정처분에 대해 국내 한 업체가 행정소송을 제기했는데 지난 2016년 대법원은 "유해한 의약품으로 인한 공중위생상의 위해는 금전 등으로 회복하기 어려운데다가 그로 인한 사회적 피해가 매우 광범위하기 때문에 정부는 그 예방을 위해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조치를 취할 필요가 크다”라며 처분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더구나 이미 유럽에서 회수 조치가 내려진 상황에서 같은 원료를 사용한 국내 제품에 대해 회수를 지시하지 않을 경우 식약처의 안이한 대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수 있다. 식약처가 후속조치를 고민하는 동안 미국에서도 해당 원료 사용 제품의 회수 명령이 내려지면 식약처는 늑장대응 비난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제약업계 입장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제지앙화하이가 제조한 다른 원료의약품에서도 유해물질이 검출되는 경우다.
발사르탄 원료에 국한돼 판매중지와 회수로 이 사건이 종결된다면 일시적 혼란에 그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제지앙화하이가 제조한 다른 원료에서도 NDMA가 확인될 경우 파장은 일파만파 확산될 수 밖에 없다.
이 경우 국내 제약업계 전방위로 무더기 판매금지와 회수 처분이 이어지면서 석면탤크 파동과 같은 혼란이 재현될 수도 있다. 의료진과 소비자들로부터 검증되지 않은 원료를 사용했다는 불신으로 이어지면서 제약산업 신뢰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식약처 관계자는 “제지앙화하이 제조 발사르탄 함유 의약품의 회수 여부는 현재 검토 중이다”면서 “추가 조사에 따라 후속조치를 결정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제약사들, 원료의약품 교체 불가피...오리지널로 처방 변경 우려
이번 조치로 제약사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더욱이 주말에 갑작스럽게 예고 없이 내려진 판매중지 조치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파장이 어디까지 확산될지 예의주시하면서 긴장하는 분위기다.
이번에 판매중지 명령을 받은 한 업체 관계자는 “일단 월요일에 출근하고 나서 대응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다. 당장 발사르탄 원료 공급처를 변경하는 작업에 착수하는 것이 급선무다”라고 말했다.
제지앙화하이의 발사르탄 원료를 사용한 업체들은 등록 원료를 바꾸는 허가변경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원료의약품이 변경될 경우 비교용출시험을 통해 기존 제품과의 동등성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에 최소 1~2달 가량 소요될 것으로 업계 관계자들은 예상한다.
제지앙화하이 제조 원료를 모두 교체하는 방안도 검토될 가능성이 크다. 후속 조사 결과 제지앙화하이의 다른 원료에서도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을 대비해 예방 차원에서 리스크를 사전에 차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제약사마다 원료 수급에 비상이 걸릴 수 밖에 없다.
식약처의 판매중지 조치에 불만을 내비치는 시각도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식약처로부터 승인받은 원료를 사용했고, 완제의약품의 유해성도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긴급하게 판매중지 조치를 내리면 회사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밖에 없다”라고 토로했다.
219개 발사르탄 의약품의 판매중지로 제네릭 업체들의 손실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판매중지 대상 제품은 모두 노바티스의 고혈압치료제 '디오반' 고혈압복합제 '엑스포지’의 제네릭 제품이다.
향후 판매중지가 해제될 가능성도 있지만, 한번 판매중지 처분을 받은 이후 처방이 다른 제품으로 변경되면 이후 원료의약품 변경 등의 조치를 취했더라도 다시 처방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판매중지에 따른 손실을 해당 제약사가 고스란히 감수해야 한다는 얘기다.
발사르탄 함유 의약품 중 38%가 판매가 중지된 터라 의료진이나 환자 입장에서는 대체 약물로의 변경이 시급한 숙제다. 식약처가 판매가 가능한 제품 리스트를 공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이에 대해 식약처 관계자는 “판매가능 품목 리스트 공개를 고민했지만 판매중지와 판매가능 2개의 리스트가 배포될 경우 더 혼선이 가중될 수도 있다고 판단, 판매중지 리스트만 공개했다”라고 설명했다.
현재로서는 오리지널 의약품이 판매중지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에 의료진이나 환자들이 오리지널로 처방을 변경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중국산 원료에 대한 불안감도 확산되면서 국내 기업들의 제네릭에 대한 기피 현상도 가중될 가능성도 있다.
이와 관련 대한고혈압학회 관계자는 “이번 사안에 대해 아직까지 학회 공식 입장은 없는 상태다. 대학병원에선 오리지널 의약품을 많이 처방하기 때문에 당장 문제가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다만 제네릭 처방을 많이 하는 개원가에서 혼선이 발생할 수 있을 것 같다. 식약처가 개원가에게 어떤 지침을 내리고 이번 사안을 풀어나갈지 지켜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판매중지 발사르탄 함유 의약품 리스트(자료: 식품의약품안전처)
천승현 기자(1000@dailyphar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