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 있지만 상표권은 없다'…10년간 이어진 아이러니
제네릭 출시 임박…녹십자, 10년 만에 상표등록 재도전
특허청, 동국제약 'Feramin' 사례 들며 특허 등록 거절
[데일리팜=김진구 기자] '페라미플루(성분명 페라미비르)'는 GC녹십자가 10년 넘게 판매 중인 독감치료제다. 지난 2006년 미국 바이오크리스트로부터 도입한 뒤, 2010년 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청 허가를 받아 지금까지 판매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GC녹십자가 페라미플루 상표권을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GC녹십자는 페라미플루의 상표를 등록하는 데 실패했다. 분명히 GC녹십자의 제품이지만, 정작 상표권은 보유하지 못한 아이러니한 상황이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물론 상표권이 없다고 해서 GC녹십자가 페라미플루를 판매하는 데 큰 지장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GC녹십자 입장에선 누군가 페라미플루와 유사한 이름의 제품을 발매하더라도 따질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페라미플루 제네릭 출시가 임박한 최근에 이르러 GC녹십자가 다시 상표권 등록을 추진하고 있는 배경이다.
◆식약처 허가 'OK'·특허청 상표등록 'NO'…'훼라민큐' 암초 만나
9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GC녹십자는 최근 특허청의 페라미플루 상표권 등록거절 결정에 불복, 특허심판원에 정식으로 심판을 청구했다. 같은 심판을 지난 2011년 이후 10년 만에 다시 청구한 것이다.
대개 제약사들은 제품의 허가·발매에 앞서 이름을 정하고 특허청에 상표를 출원, 등록한다. 그래야 유사한 이름의 경쟁제품이 나왔을 때 상표권자로 이를 견제할 수 있다.
▲녹십자 독감치료제 페라미플루 제품사진.
10년 전 페라미플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GC녹십자는 식약처 품목허가를 받기 약 1년 전인 2009년 11월 페라미플루 상표를 출원했다.
특허청이 상표 등록을 거절했다. 선행 상표와 유사하다는 이유였다. 특허청이 언급한 선행상표는 동국제약의 'Feramin'이었다. 현재는 '훼라민큐'라는 이름으로 판매 중인 여성갱년기 치료제의 원등록 상표다. 동국제약은 1997년과 2008년 이 상표를 등록한 바 있다.
특허청은 페라미플루를 '페라미'와 '플루'로 나눠서봤다. 조어인 '페라미'에 독감을 의미하는 '플루'가 결합됐다고 판단했다. 관건은 '페라미'였다. 이에 대해 특허청은 "기존의 'Feramin'과 '페라미'는 3음절의 끝부분에만 차이가 있어 매우 유사하다"고 판단했다.
GC녹십자는 특허청 결정에 불복하며 특허심판원에 심판을 청구했다. GC녹십자는 페라미플루라는 이름을 성분명인 '페라미비르'에서 따왔다며 반박했다. 페라미플루는 5음절인 반면 Feramin은 3음절이라 차이가 확연하다는 주장도 펼쳤다. 또, Feramin은 통상 '훼라민'으로 발음되고 있어 페라미와 유사성이 떨어진다고도 피력했다.
그러나 특허심판원은 GC녹십자의 주장을 기각했다. 특허청의 기존 판단이 옳다고 재확인하면서 페라미특허 등록을 둘러싼 도전은 일단락됐다.
◆흥행 예상 못한 녹십자, 2심행 대신 상표등록 포기
다만 GC녹십자는 1심 패배 후 사건을 2심(특허법원)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 페라미플루 특허가 2027년까지 20년 가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당장 급한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 큰 이유는 당시 시장에서 페라미플루의 입지였다. 10년 전 로슈의 '타미플루'가 과독점하던 독감치료제 시장에서 페라미플루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GC녹십자 입장에선 소송비용이 페라미플루 매출보다 더 크게 나올 우려가 컸다. 결국 GC녹십자는 항소를 포기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독감치료제 시장에서 페라미플루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타미플루가 1일 2회씩 5일간 복용하는 반면, 페라미플루는 15~30분간 1회 주사만으로 독감을 치료할 수 있다는 장점을 앞세워 실적을 조금씩 늘렸다.
2017년엔 타미플루 특허가 만료됐다. 제네릭이 쏟아지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여기에 타미플루 부작용 이슈가 더해졌다. 이 약을 복용한 환자들이 환각증세를 보이며 추락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페라미플루는 반사이익을 크게 얻었다. 실제 식약처에 따르면 GC녹십자의 페라미플루 생산실적은 2016년까지 17억원에 그쳤으나, 2019년 161억원으로 3년 만에 10배 가까이 급증한 것으로 집계된다.
◆10년 만에 상표등록 재도전…제네릭 특허공략 영향
독감치료제 시장에서 페라미플루의 인기가 치솟자, 제네릭사들의 특허 도전이 이어졌다.
2019년 11월 일양약품을 시작으로 한미약품·종근당·JW중외제약·JW생명과학·CJ헬스케어(현 HK이노엔)·콜마파마·한국콜마(현 제뉴원사이언스)·동광제약·펜믹스 등 11곳이 특허 무효심판을 청구했다.
올해 4월 1심 심결이 나왔다. 종근당·HK이노엔·JW중외제약·JW생명과학이 승리했다. 나머지 업체들은 결론이 나기 전 심판을 자진 취하했다.
1심 승리 후 제네릭사들은 제품을 연이어 허가받았다. 종근당 '페라원스', HK이노엔 '이노엔플루', JW생명과학 '플루엔페라' 등이다. 이르면 올겨울 독감치료제 시장에 가세할 것으로 예상된다.
제네릭 가세가 임박하자 GC녹십자의 마음이 급해졌다. GC녹십자는 다시 한 번 상표 등록에 나섰다. 10년 전 한 차례 거절이 결정됐지만, GC녹십자는 '출원인 정보변경'을 통해 재도전을 선택했다.
◆오리지널보다 먼저 제네릭 상표등록…녹십자 재도전 성공할까
지난해 9월 GC녹십자는 상표등록출원서를 특허청에 제출했다. 그러나 특허청 판단은 10년 전과 같았다. 역시나 동국제약 Feramin이 페라미플루의 발목을 잡았다.
올해 4월 GC녹십자는 이같은 결정에 불복하며 특허심판원에 다시 한 번 심판을 청구했다. 여기까진 10년 전과 완전히 같다. 다만, 아직 특허심판원 심결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
만약 GC녹십자가 10년 만에 페라미플루 상표 등록에 성공한다면, 이후로 쏟아질 유사한 이름의 제네릭에 대한 상표 견제가 가능해질 전망이다.
반대로 이번에도 페라미플루 상표 등록이 무산된다면 이를 견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당장 내일 누군가가 '페라미플루2'라는 상표를 등록하더라도 마땅한 방법이 없다. 상표의 권리가 애초에 GC녹십자에겐 없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페라미플루보다 훨씬 늦게 출원된 제네릭 제품들이 먼저 상표 등록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노엔플루'와 '플루엔페라'는 별 문제 없이 상표로 등록됐다. 선행 상표인 Feramin과 거리가 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종근당 '페라원스'의 경우 아직 등록 전이다. 현재 '출원 공고' 상태다. 정식 상표로 등록되기 전 이의신청을 받는 단계다. 별도의 이의신청이 없으면 큰 무리 없이 상표로 등록될 가능성이 크다. GC녹십자 입장에선 이의신청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이 이미 펼쳐진 셈이다.
김진구 기자(kjg@dailyphar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