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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스타트

272억 투자 4599억 처분…녹십자, R&D 역량의 현금화

  • 차지현 기자
  • 2026-05-27 11:52:52
  • 녹십자, 큐레보 지분 전량 양도…최대 4599억, 작년 영업익 6.6배
  • 8년 전 미국 현지법인 설립, 대상포진 백신 글로벌 개발 전략 성과
  • CMO·로열티 등 후속 수익 기대…SCIG·프리미엄 백신 투자 재원 확보

[데일리팜=차지현 기자] GC녹십자가 미국 백신 자회사를 글로벌 빅파마에 매각한다. 이번 거래를 통해 녹십자는 대규모 현금을 확보하는 동시에 대상포진 백신 위탁생산(CMO) 계약을 유지하며 중장기 수익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국내 기업이 자체적으로 발굴·개발한 백신 후보물질을 미국 현지법인에서 글로벌 임상 단계까지 끌어올린 뒤, 글로벌 빅파마의 인수합병(M&A)으로 연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연간 영업이익 6배 넘는 현금 확보…'업프론트만 3066억' 실속 딜

27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녹십자는 보유 중인 미국 큐레보 주식 2107만5336주 전량을 일라이 릴리에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양도금액은 4599억원으로 지난해 말 녹십자 연결기준 자기자본의 33.0%에 해당하는 초대형 계약이다. 지난해 녹십자 연결 기준 영업이익이 692억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거래의 최대 양도 금액은 연간 영업이익의 6.6배에 달한다.

녹십자가 큐레보에 투입한 최초취득금액은 사업보고서 기준 보통주 55억원, 전환우선주 216억원 등 총 272억원 수준이다. 이번 최대 양도금액 4599억원은 최초취득금액의 17배에 육박다. 지난해 말 장부가액 575억원과 비교해도 약 8배 규모다. 미국 현지법인 설립 이후 약 8년 만에 큐레보 투자가 대규모 회수 성과로 이어진 셈이다.

이번 거래는 거래 종결 조건과 성과 달성에 따라 대금이 분할 지급되는 구조다. 총 양도 대금 중 반환 의무가 없는 선급금(업프론트)은 3066억원으로 전체 계약의 66.7% 수준이다. 이 중 2847억원은 정부 규제당국 승인 등 거래 종결 조건 충족 후 6영업일 내 즉시 지급된다. 나머지 219억원은 추가 후행 조건을 충족할 경우 수령하게 된다. 거래 종결 기한은 오는 8월 24일이다.

향후 상업화 과정에서 특정 조건을 만족할 시 지급되는 경상 기술료(마일스톤)는 1534억원이다. 일정 기간 내 큐레보가 개발 중인 물질과 관련 제품이 매출 목표를 달성하면 45일 이내 지급되는 형태로 설계됐다. 전체 양도금액은 업프론트와 조건부 마일스톤을 합산한 최대 수령 가능 금액이다.

이번 거래는 릴리가 감염병 예방 백신 포트폴리오를 대대적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릴리는 26일(현지 시각) 큐레보를 포함해 림마텍, 백신 컴퍼니 등 3개사를 총 38억 달러에 동시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릴리는 비만·당뇨 치료제 시장에서 확보한 막대한 현금창출력을 바탕으로 감염병 백신 개발사와 차세대 예방 플랫폼에 투자, 기존 치료제 중심 포트폴리오를 질병 예방 영역으로 확장하겠다는 구상이다.

선두 '싱그릭스' 빈틈 겨냥…글로벌 빅파마, '3상 진입 가능' 가치 인정

큐레보는 녹십자가 2018년 글로벌 백신 시장 진출을 위해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 세운 백신 개발 법인이다. 당시 녹십자는 독감, 수두, B형간염 등 기초 백신 분야에서 국내 대표 백신기업으로 자리 잡고 있었지만 글로벌 백신 시장의 성장축은 대상포진·폐렴구균·자궁경부암 등 고부가가치 프리미엄 백신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국내 백신 시장 성장 정체와 경쟁 심화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에서 녹십자는 미국 현지 개발법인을 통한 프리미엄 백신 개발이라는 결단을 내렸다.

설립 초기 큐레보는 녹십자와 목암생명과학연구소가 공동 개발한 대상포진 백신 후보물질 '아메조스바테인'(프로젝트명 CRV-101)의 미국 임상 개발을 맡았다. 녹십자가 국내에서 개발한 뒤 해외로 진출하는 방식이 아니라, 처음부터 미국 현지 법인을 통해 임상과 허가 전략을 짜는 구조를 택한 것이다.

아메조스바테인은 면역증강제를 포함한 차세대 단백질 재조합(서브유닛) 방식 대상포진 백신 후보물질이다. 아메조스바테인이 겨냥한 경쟁 제품은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의 대상포진 백신 '싱그릭스'다. 싱그릭스는 아메조스바테인과 같은 재조합 단백질 백신으로 높은 예방효과를 앞세워 글로벌 대상포진 백신 시장을 사실상 주도하는 표준 제품으로 자리 잡았다.

다만 싱그릭스는 주사 부위의 중증 통증, 오한, 무기력감 등 부작용 발생률이 높아 환자들이 2차 접종을 기피하는 미충족 수요가 컸다. 큐레보는 차세대 합성 면역증강제를 적용해 면역원성은 유지하면서 접종 후 반응성을 낮추는 전략으로 싱그릭스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큐레보는 아메조스바테인 다국가 임상 2상에서 싱그릭스와 직접 비교를 통해 비열등한 면역원성과 우수한 내약성을 입증했다.

실제 릴리는 인수 발표에서 아메조스바테인을 '임상 3상 진입 가능 단계(Phase 3-ready)'의 대상포진 백신 후보물질로 소개했다. 싱그릭스와 직접 비교한 임상 2상에서 확인한 내약성 차별화가 이번 인수의 핵심 동력이 된 것으로 풀이된다.

외부 자본으로 리스크 분산…CMO 계약 승계, 후속 수익도 기대

녹십자의 큐레보 전략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외부 자본 활용이다. 큐레보를 별도 법인으로 세운 뒤 글로벌 바이오 투자자들을 유치해 개발 자금을 조달했다. 큐레보는 2022년 2월 RA 캐피탈 매니지먼트가 주도한 시리즈A 라운드에서 6000만 달러 규모 투자를 유치한 데 이어 같은 해 11월 2600만 달러 규모 추가 투자를 이끌어냈다. 이후 지난해 3월에는 1억1000만달러 규모의 시리즈B 투자 유치에도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녹십자는 지분율 희석을 감수했으나 대규모 임상 개발에 필요한 자금 부담과 개발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었다. 특히 이 같은 전략은 이번 릴리 인수 계약으로 대규모 투자 회수로 이어졌다. 전체 양도대금 중 상당 부분은 업프론트 형태로 거래 종결 이후 유입되며 지분 매각 대금은 향후 녹십자의 당기순이익에 반영될 예정이다.

녹십자는 이번 매각 대금을 피하주사형 면역글로불린(SCIG), 프리미엄 백신, 혁신 희귀의약품 개발에 활용할 계획이다. 혈액제제와 백신이라는 기존 강점 분야를 유지하면서 고부가가치 영역으로 포트폴리오를 넓히는 데 필요한 투자 재원을 확보했다는 얘기다. 이번 자금 유입으로 면역글로불린 사업과 차세대 프리미엄 백신 연구개발에 한층 탄력이 붙을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CMO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앞서 녹십자는 지난해 10월 큐레보와 아메조스바테인 상업화 물량 일부에 대한 위탁생산 권리 확보 계약을 체결했다. 릴리가 큐레보를 인수한 뒤 아메조스바테인 임상 3상과 상업화 준비를 본격화하면 녹십자의 오창공장 등 백신 생산 역량이 글로벌 후속 공급망에 직접 편입될 가능성이 크다. 녹십자는 큐레보 지분 매각으로 투자 회수에 나서는 동시에 상업화 이후 생산 매출을 기대할 수 있는 연결고리까지 마련해 둔 셈이다.

여기에 녹십자는 이번 큐레보 사례로 글로벌 개발 경험까지 축적했다는 평가다. 녹십자는 큐레보를 통해 미국 현지 법인 설립과 글로벌 투자 유치, 미국 임상 개발, 빅파마 M&A까지 이어지는 전 과정을 경험했다. 이는 향후 녹십자가 보유한 다른 백신·희귀질환·혈액제제 파이프라인의 차세대 글로벌 전략과 진출 로드맵 수립에 활용 가능한 귀중한 경험 자산이라는 분석이다.

이날 릴리와 계약 공시 직후 시장도 즉각 반응했다. 27일 녹십자 주가는 전 거래일 종가 14만3200원보다 6.6% 오른 15만2600원에 거래를 시작했다. 오전 10시32분 현재 녹십자 주가는 15만8600원으로 전일 대비 10.8% 상승 중이다. 시장에서 이번 거래를 단순 지분 처분을 넘어 대규모 현금 확보와 후속 CMO·로열티 수익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둔 전략적 회수 사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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