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세 현역입니다…GMP는 즐거운 숙명이고요"
- 조광연
- 2013-07-24 06:3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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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P를 사랑한 남자 백우현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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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에 GMP를 만났던 백 원장은 이를 가벼이 여기지 않고 갈고 닦아 그의 젊은 시절을 빛냈고, 지금도 현장에서 그의 삶을 완성해 가고 있는 인물이다.
1970년대 GMP 도입 당시부터 지금까지 'GMP의 일거수 일투족'을 꿰고 있는 인물이자 40년 가까이 규정 하나 하나 다듬어 온 전문지식인이다.
그래서 그에게 GMP의 산증인이라는 칭호를 부여한다해도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인터뷰 때문에 경기도 안양에 자리잡은 한국제약기술교육원을 방문했을 때 그는 GMP 규정처럼 촘촘한 '백우현-약 관련 연표'를 만들었다가 내 놓았다.
인터뷰어 입장에선 참 반가운 인터뷰이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이력을 표 왼편에, 우리나라 제약업계 GMP 역사와 주요 사건을 오른편에 배치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기발했고, 성정은 치밀했다.
"GMP란 경영진의 마인드"라고 일갈한 그는 "좀 쉬면서 구상하고 있는 책을 완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제헌절 오전 그를 만났다.

"의무감이랄까, 숙명이랄까 그런 건데요, 이왕이면 즐거운 숙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름 우리나라 GMP의 산파 역할을 했고, 그 수준이 국제화되는데 벽돌 한장은 올려 놓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평가하고 격려하고 싶으니까요. 그리고 여전히 할일이 많으니까요."
▶GMP는 언제 세상에 나왔죠?
"지구상에 GMP가 태어난 건 1963년 이에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1962년 미국 식품의약품화장품법(FDC)개정안에 'Good Manufaturing Practice에 의해 제조 관리된 것이 아니면 불량으로 본다'고 하고, 이듬해 공포했거든요. 세계보건기구는 이보다 늦은 1969년 공포했어요. 1974년에 일본 GMP가 공포됐습니다."
▶첫 인연 어떻게 맺었나요? "1973년 전 종근당 서울 구로동 공장 생산부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죠. 당시 국내 제약업계는 항생물질 대부분을 완제로 수입해 판매했는데 종근당 만큼은 클로람페니콜 원료항생물질을 국내 최초로 생산하고 있었어요. 문제는 수출이었는데 미국에 이를 팔아야 겠는데 그러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GMP였던 겁니다. 그때 연을 맺게 됐어요."
▶어떻게 말인가요?
"공장 목표관리제도(MBO)도입을 주도하던 1973년 어느 날 윗분이 부르시데요. 그래서 갔더니 GMP 한번 연구해봐 하시는 거에요. GMP가 뭔데요?라고 물을 정도로 생소한 말이었죠. 사실 그 때 제약업계 조차 GMP와 GNP(국민총생산)를 헷갈려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어쨌든 회사 오더(Order)니 안할 재간은 없잖아요. 한번 부딪혀 보기로 했죠."
▶이런 말씀 그렇지만 '해야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 같은 규정이 빼곡한 GMP 책자를 보면 정이 안가던데, 어떻게 견디셨죠? 특히 개념조차 모호했던 시절인데요.
"그때가 30대 후반인가 40대 초반인가 그랬는데 조항, 규정을 쓰는 일이 적성에 맞더군요. 나름 소질을 그때 재발견 한 것처럼요. 제가 일본 말은 자신이 있었는데 일본 참고서가 많이 도움이 됐어요.일본도 GMP 도입에 앞서 미국과 유럽에 조사단을 파견해 자료를 꼼꼼히 정리해 놓았는데 그걸 면밀히 살펴보고 연구를 했어요."
▶종근당 GMP 어떻게 됐죠?
"결국 CKD-GMP 기준을 작성하고 교육하고 이에 따라 시설을 개조했죠. 클로람페니콜과 관련해 인스펙션을 받고 통과됐어요. FDA 입장서 승인의 의미는 그 정도 시설에서 제조 관리된 제품이라면 미국 시민이 먹어도 안전하다는 의미인 거죠. 개인적 성취도 컸고, 회사에 뭔가 한 것도 같아 보람도 컸어요."
▶적성에 맞고 소질이 있던 GMP, 그 이후 버리셨나요?
"아니죠. 제약회사 공장장으로 구성된 이칠회(二七會)에서 설명하고 홍보를 했죠. 27명을 데드라인으로 매월 27일 만나기로 한 연구모임이었지만 지금은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고 있으며 제약사 공장에서 근무하는 임원급 약사 100여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칠회는 별칭이 됐고, 정식 명칭은 한국제약기술연구회로 활동합니다. 이칠회는 꾸준히 활동을 하면서 1975년 일본과 유럽의 GMP 자료를 편집해 발간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GMP 자료집인 셈이죠."
▶정부 일에도 참여하셨죠.
"종근당에서 처음 GMP 규정을 만들고 활동하다 보니 정부가 부르데요. 1974년 보사부 약무제도과 품질관리계 의뢰로 KGMP 초안 작성에 참여하게 된 거죠. 사실상 제가 초안을 만들었어요. 초안은 당시 중앙약심에 올라가 항목별로 이의가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하는 축조 심의를 가졌는데, 사실상 혼자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당시엔 실상 저 말고 전문가가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이 초안은 1977년 3월 15일 보사부 장관이름으로 KGMP 기준이 공포됐습니다."
▶40년을 한 분야에 천착한 전문가 입장서 우리나라 GMP 수준 어떻게 평가하세요?
"감히 선진국 수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국내 여러 제약회사가 EU 등에 의약품 원료를 수출하고 속속 완제의약품 등록을 하고 있잖아요. 한마디로 거기 수준과 맞으니까 가능한거죠."
▶1980년대 국내 제약회사 GMP가 시설에 치우쳐 고도화된 대량 생산체제를 불렀고, 그 부작용이 제약회사들을 백화점처럼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는데요.
"그런 비판도 가능하겠지만요, 전 동의하기 힘들어요. 청정시설을 만들고, 자동화 생산시스템을 만들고 하는 건 GMP로 가는 첫 걸음이니까요. 그 이후에야 비로소 사람의 역할을 강조하는 소프트웨어 GMP가 따라 가는 건 순리죠. 선진화된 공장이 관련 종사자들의 GMP 개념을 바꿔놓고, 이게 더 발전하며 숙성되면서 완성의 단계로 이행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돌아보니 GMP의 수준은 어디서 결정되던가요.
"회사 경영층의 품질에 대한 마인드죠. 경영진의 마인드 이상 GMP의 수준이 실현될 수는 없어요. 결국 경영진의 마인드가 공장 근무자 개개인들에게 이입되고, 그게 의약품의 품질로 반영되는 겁니다. 그동안 지켜보니 그래요."
▶GMP와 원장님을 뗄 수 없는데, 대체 원장님께 그 GMP는 뭔가요.
"의무감이자 숙명이죠. 아주 즐거운 숙명이에요." 
그는 KGMP 실시상황평가표를 개발했고, KGMP 해설서 편집을 주관해 3개정까지 냈다. 2003년엔 현행 GMP 기준의 모태가 된 KGMP 선진모델연구 식약청 과제의 주관연구책임자로 일했으며, 밸리데이션(Validation)의 이론과 실제라는 자료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2007년엔 국내 최초로 제약기술·GMP교육 전문기관인 '한국제약기술교육원'을 협력업체와 함께 창립하는데 참여해 원장으로 취임했다. 이듬해엔 국내 처음으로 제약기술·GMP 전문지인 팜텍을 창간했다. 2011년엔 원료의약품 GMP해설서를 발간했다. 그는 1973년 GMP와 첫 인연을 맺은 이후 40년간 'GMP의 남자'였다.
그는 스스로 'The First'라고 말하는 첫 번째 일을 많이 했다. 그는 11가지로 제시했다. 앞서 말한대로 여러 GMP 관련서를 낸 것은 물론 국제제약기술단체인 PDA 한국지사를 창립했다. 12년 노력 끝에 3만3263개의 보건의약계 용어를 1664페이지에 담아 정리한 '종합 실용 의약용어사전(서울대 출판문화원)'도 역작으로 꼽힌다. 이 사전은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설명하는 상징물이나 다름없다.
▶약학대학은 왜 가셨죠? 유명인들 중엔 의대가려다 약대를 선택한 사례가 적지 않은데.
"원래 서울법대를 가려고 했었죠. 그런데 한국전쟁 때,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제주도로 피난 온 고 고윤식 교수(중앙약대)님으로부터 화학을 배웠어요. 어찌나 재미있던지, 이거다 싶었죠. 나도 약대들어가야 겠다 결심했어요."
▶교수는 선망의 대상이었을텐데 제약회사 취직은 의외인데요.
"가정 형편상 무급으로 몇년을 버텨야했던 조교 생활을 감당할 수 없었어요. 하는수 없이 취직하게 됐어요."
▶경력을 보면 제약회사 공장 경력이 많으신데, 특히 제품 개발에도 관여를 많이 하신 게 특징적입니다.
"1960년에는 애주가의 명콤비라는 광고로 잘 알려진 청계약품의 씹어먹는 정제 쿨탑을 개량했죠. 텁텁한 맛을 상큼한 맛으로 바꿔 히트상품이 됐어요.
1972년 동화약품에선 신제품개발위원장을 맡아 판콜A내복액을 개발했어요. 처방과 신청서류 작성과 허가 신청을 맡았죠. 히트를 쳤고 스테디셀러가 됐죠.
1990년대 보령제약에 있을 땐 복합신약 겔포스 M을 개발했어요. 겔포스는 매출규모가 컸지만 변비를 유발하는 약점이 있었죠. 이를 개선한 겁니다."

"자랑스럽죠. 어느 모임에 가도 제 또래 만나기 어려우니까요. 서울약대 동기인 일동후디스 이금기 회장, 신풍제약 장용택 회장 정도가 현역일거에요. 두 친구는 오너고, 전 아니지만요. 하하."
▶건강관리 어떻게 하세요.
"할 일이 없으면 건강은 유지가 안됩니다. 그래서 GMP와 관련한 새 출판을 계획하고 있고, 짬짬이 '건강이야기도 시리즈로 정리해서 몇백부 찍어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있어요. 매일 아침 5시 20분에 일어나 6시에 스포츠 센터에 도착해 한 시간 운동합니다. 하루는 러닝, 하루는 근력운동을 번갈아가며 하죠. 서예와 동양화도 취미인데 매번 이일 마치고 하자, 저일 마치면 하자하면서 제대로 못합니다."
대한약학회를 비롯해 여러 학술단체서 임원으로도 활약했던 백우현 원장은 지금도 앞에서 말한 다양한 활동 외에 각종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올해 가을학기부터 아주대 약학대학 겸임교수로 나갈 예정이다.
그는 많은 활동을 한 덕에 보건사회부장관 표창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경력도 많다. 그가 사랑한 GMP는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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