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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아련한 기억들, 내 봄 날은 그때였을까?

  • 이혜경
  • 2013-12-31 06:25:00
  • 1980년대 사회초년 약사의 꿈결같은 이야기

"얘, 어멈아, 병원 나오는게 어떻겠니?"

1976년 3월 약사면허를 땄다. 꼬박 3년 7개월을 이대부속병원에서 일했다. 두 번의 자연유산. 시어머니가 나에게 퇴직을 권했다. 그렇게 나는 병원을 나왔다.

만성피로를 달고 살던 몸은 편안해졌지만 일을 하고 싶었다. 내 약국을 갖고 싶어졌다. 병원에 사표를 낸지 6개월 만에 든 생각이었다. 고민 끝에 약국을 차리기로 했다.

남편과 얻은 성수아파트를 500만원에 전세 놓고 250만 원짜리 다세대주택 전셋집을 성수동 골목에 얻었다. 눈 여겨둔 약국 자리가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10만원이니, 얼추 계산이 맞았다.

1980년 4월 서광약국을 열었다. 여름엔 약국 문을 활짝 열어 더위를 식히고, 겨울엔 집에서 구공탄을 들고 나와 약국 주물난로에 불을 피우면서 한 해, 두 해를 보냈다.

#2013년 현재 - 처방전에 울고 웃고= '딸랑'. 처방전을 든 환자가 약국을 들어온다. 옆에 위치한 산부인과 병원 환자다.

이 곳 약국에서 하는 일은 정해져 있다. 처방약은 한정됐고 간간히 산모와 아이들을 위한 영양제를 판매한다.

주 5일 근무. 그 중 병원 오후 진료가 없는 화요일과 목요일은 약국도 조용하다. 문을 열어도 약국을 찾는 환자가 거의 없다.

약국 구석진 곳에 놓인 곳에서 20여 년 전 장부를 찾았다.

'1987'이 떡하니 적혀있다. 1980년대 후반에 작성했던 장부다. 삼정톤, 진생업, 원비.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창 잘 나가던 드링크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있다.

보험청구할 일도, 처방전 받을 일도 없었던 그때. 맞아. 그런 때가 있었다.

#과거 1 - 90만원 희망적금 넣고 행복하던 그 시절= "정 약사님, 동전 교환 왔어요. 오늘은 얼마 저금 하실래요?"

신협 미스 신이다. 매일 점심시간이 지나면 약국을 들른다. 꼬박꼬박 오천 원씩 저금했고, 동전교환은 만원 정도했다.

휴. 오늘은 한 달 치 장부를 정리하는 날이다. 1986년 마지막 달을 정리하려니 왠지 기분이 묘하다.

12월 1일부터 31일까지, 일요일 4일 쉬었으니 이번 달은 27일 일했다.

총 매출은 735만7000원. 동전교환 30만원은 제외했다. 하루 평균 27만원을 벌었다. 뭐, 벌면 뭐해. 지출이 얼마였지.

일별로 정리한 장부를 보면서 계산기를 두드린다.

어휴. 이놈의 월세는 계속 오른다. 약국 열 때 10만원이던 월세가 18만원으로 올랐다. 주물난로는 기름난로로 바꿨다. 석유 값으로 2만4000원이나 나갔다.

담배 판매량은 이번 달도 엄청나다. 자판을 두드리니 80만원어치 담배를 사서 팔았다. 드링크 구입비는 55만 원 정도. 45만원 어치 박카스를 샀다. 삼정톤, 진생업, 원비는 두 박스 정도만 구입했다.

신정을 앞둬서인지 이번 달은 유독 드링크를 많이 찾는다.

명문약국이랑 나눠서 구입한 약품 값 22만원을 챙겨줬고, 도매상에 약품구입비로 준 돈이 얼마더라. '탁탁탁' 계산기를 두드리니 530만 원 정도다.

반회비 6000원, 약업신문 5000원, 동아일보 2700원, 성금 3000원 자질구레한 지출비용을 다 정리하고 나니, 이번 달 희망적금은 90만 원 정도 할 수 있게 됐다.

#과거 2 - 피부약 전문, 다이어트약 전문으로 유명세= 약국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이대부속병원 병원약사 근무시절, 피부과 과장의 처방 노하우를 배운 것이 한몫했다.

기미, 습진, 땀띠, 손트임 등 피부과 약을 정말 잘 짓는다고 소문이 났다. 명반을 만들고, 글리세롤을 만드는데 나만의 노하우가 있었다.

교갑에 담아서 조제해주던 연고도 인기가 많았는데. 이제와 솔직히 말하면 스테로이드제를 아주 조금 섞었는데, 효과가 좋긴 했다. 그러나 곧 그만두었다.

1990년 초중반대 성수동에서 분당으로 약국을 옮겼다. 금호상가 1층에서 한약재를 주로 하다가, 다이어트약 조제를 시작하면서 환자가 부쩍 늘었다.

21세기 약국이라는 이름을 달고 금호상가 2층에서 상담전문약국을 운영했다. 생각해보니, 그 시절 상담약국이 잘 나가던 이유가 있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7년 IMF. 민심이 싱숭생숭 했다. 삼풍백화점 붕괴 소식이 들리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약국에 들려 가미온담탕을 찾았다. 놀란가슴을 쓸어내리려 약국으로 사람들이 몰린 것이다.

우리 약국은 20대 아가씨들이 다이어트약을 조제하기 위해 많이 찾았는데 IMF 사태를 맞은 이후, 아가씨들 방문이 부쩍 늘었다. 실질한 이후 스트레스를 받아서 살이 찐 여성들이 재취업을 준비하면서 다이어트약을 찾는일이 많아졌다.

#과거, 그리고 현재 - 그리움= 새벽녘 집에서 구공탄에 불붙여 약국으로 옮겨가며 추위를 달래던 그 시절.

자정까지 약국을 지켰고, 문 닫힌 약국 셔터를 올려 담배를 훔쳐간 도둑들의 흔적을 아침에 마주할 때면 눈물로 두려움을 씻어야 했다.

그래도 그 시절이 나에게 봄날과 같은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것을 배웠고, 얻었기 때문이다.

당시 약국 피크타임은 직장인 퇴근 시간 이후였다. 화공약품부터 위생품, 생필품, 화장품까지 약국에서 모두 관리했다.

지금은 약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메칠알콜, 염산, 빙초산, 중조, 붕사를 약국에 납품하는 사람을 '화공 아저씨'라 불렀다. '위생 아저씨'는 에프킬라, 생리대 등을 가져왔고, 참존과 릴리에서 화장품을 들여놨다.

약국에 손님이 없는 점심시간 이후엔 한약조제를 배우러 다녔다. 경동시장에서 약제를 떼와 약국에서 지어준 것도 이맘때다.

사람들이 외국에서 사 온 녹용을 달여 주고, 수삼을 홍삼으로 만드는 기계를 구입해서 약국 앞에 '수삼을 홍삼으로 만들어 드립니다'를 붙였는데 인기가 최고였다.

약국이 동네 사랑방으로 불릴 수 밖에 없는 이유기도 했다.

영희네 할머니는 시간만 나면 홍시 2개를 들고 약국을 찾는다. "정 약사, 단감 나눠먹을 터유?"라며 약국문을 빼꼼 연다. 두 시간 정도 수다를 떨었을까, 영희네 할머니는 백양메리야스를 사서 나갔다.

약국에 앉아 있으면 백일 떡, 돌 떡이 자주 들어온다.

아, 참. 배불러 다니던 수지네 엄마가 둘째를 낳으면 귀룡탕 만들어 간다고 했었는데. 그 땐 말 없어도 산후보약을 준비했을 정도다.

어느 집 누가 아이를 낳고, 어느 분이 돌아가셨는지 가장 먼저 알았던 그 때가 그리워 진다.

[편집자주: 이 이야기는 경기도 분당 건강샘약국 정숙희 약사를 인터뷰한 이후 각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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