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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스터디

[이천분의 일] "내 시력은 늘 0.1…별을 볼 수 있을까요"

  • 정새임
  • 2023-02-28 06:20:14
  • 망막색소변성증, 망막 기능 상실로 시력 잃는 희귀질환
  • 공부·등교 모든 게 쉽지 않았던 10대…신검 때 비로소 진단
  • "달만 보이는 세상…치료 받고 밤 하늘의 별 보고파"

#망막색소변성증

안구의 망막에 색소가 쌓이면서 기능이 소실되는 질환. 이 병이 진행되면 시각 세포의 손상으로 점차 시야가 좁아지며 시력을 잃게 된다. 유전적 원인이 가장 크며 국내 환자 수는 약 1만~1만5000여 명으로 추정된다.

정민(가명, 41) 씨는 어릴 때부터 시력이 좋지 않은 아이었습니다. 갓난아기일 땐 사람과 눈을 잘 맞추지 못해 부모님이 이상하다고도 생각했죠. 안경을 맞춰도 시력이 0.1을 넘기진 못했습니다. 학생인 정민 씨가 할 수 있는 건 글씨가 큰 책을 보고, 교실 맨 앞자리에 앉아 가장 가까이서 칠판을 보는 것이었죠.

계단을 자주 헛디딘 다거나 글씨가 작은 책들을 잘 읽지 못하는 것, 해가 늦게 뜨는 겨울철 등굣길이 쉽지 않은 건 정민 씨의 일상이었습니다. 아쉬웠던 건 좋아하는 소설책을 많이 읽지 못한 거라고 하네요. 중학교 때까지 책 읽는 걸 좋아했지만, 글씨가 작은 장편 소설은 정민 씨에게 큰 장벽으로 다가왔죠.

"한 번은 삼국지가 너무 읽고 싶어 큰 맘 먹고 전집을 샀는데, 결국 완독을 포기했어요. 글씨가 작고 빽빽해 한 페이지를 읽는데 10분 이상이 걸리더라고요."

시력이 늘 0.1이었던 정민 씨에겐 책 읽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정민 씨는 특히 야맹증이 심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해가 지면 물체를 분간하기 힘들어 저녁엔 친구들과도 밖에서 어울리지 못했죠. 시험이 끝나면 하교 후 친구들과 저녁까지 놀며 스트레스를 풀곤 했던 그런 추억이 정민 씨에겐 없었습니다.

"남들과 다르다는 걸 군대 신체검사 때 알았어요. 희귀병이었더라고요."

스무살이 돼서야 받아든 진단명은 '망막색소변성증'이었습니다. RP라고도 부르죠. 5000명 중 1명 꼴로 걸린다는 희귀병을 정민 씨가 앓고 있었습니다.

망막색소변성증은 안구의 망막에 색소가 쌓이면서 망막 기능이 점차 상실되는 질환을 말하는데요. 진행성·유전성 질환에 속합니다. 망막은 안구의 가장 안쪽을 덮고 있는 막으로 빛을 전기 신호로 바꿔 뇌로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시각 세포는 어두운 곳에서 명암을 구별하고 주변 시야를 볼 수 있게 하거나(막대세포) 밝은 곳에서 색을 구별하고 중심시야를 선명하게 볼 수 있게(원뿔세포) 하죠. 망막색소변성증은 망막 내 시각 세포를 손상시켜 시각 세포가 제기능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시력저하, 야맹증, 눈부심, 시야 협착 등의 증상을 거쳐 실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망막색소변성증 환자들은 시각 기능을 점점 잃으며 실명에 이르게 됩니다.
정민 씨가 일반적인 근시 교정으로는 시력이 개선되지 않고 야맹증이 심했던 이유가 바로 이 망막색소변성증 때문이었습니다. 4년 전 우리나라에서 망막색소변성 환자 246명(492안)을 대상으로 임상적 특성을 알아본 적이 있는데요. 주된 증상이 정민 씨와 같은 시력저하 그리고 야맹증이었다고 해요.

집안에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는 가족이 아무도 없어 정민 씨는 물론 부모님도 희귀병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죠. 이 병은 성인이 된 후에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정민 씨의 경우 어릴 때부터 증상을 보인 케이스 입니다. 30대, 40대에 갑자기 증상이 급격히 나타나 진단을 받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합니다.

다행히 정민 씨는 마흔이 된 현재 0.1의 시력과 심한 야맹증이 더 나빠지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증상이 악화돼 실명이 될 지 모른다는 공포를 안고 살아가죠. 정민 씨가 처음 자신의 질환에 대해 알게 됐을 때 가장 크게 느꼈던 공포도 바로 '실명'이었습니다.

"증상이야 진단 전과 후가 달라질 게 없으니까 희귀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큰 느낌은 없었어요. 단 하나 실명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가 컸죠."

이 병이 유전성이라는 점도 환자들에겐 마음의 짐이 됩니다. 물론 우성 유전이냐 열성 유전이냐에 따라 유전될 확률은 다릅니다. 병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자식이 보인자가 된다는 점에서 결혼, 임신에 대한 환자들의 고민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환자들을 가장 허탈하게 만드는 사실은 진단을 받아도 치료할 길이 없다는 것이죠. 정민 씨가 진단 전후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한 배경도 여기 있습니다. 당뇨나 고혈압 진단을 받으면 치료제를 써서 악화를 막을 수 있죠. 망막색소변성증은 최근까지도 치료제가 없어 병이 진행되면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환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비타민A, 루테인과 같은 영양제를 먹거나 자외선을 차단해주는 기능성 안경을 맞추는 것이 전부였죠. 지금도 대부분의 환자들이 택하고 있는 관리법입니다.

"어릴 때부터 0.1 시력으로 지내다 보니 나름 적응하며 지내고 있어요. 일도 하고, 먼 거리가 아니라면 낮에는 혼자 다닐 수도 있고요. 요즘의 불편함이라면 넷플릭스에서 해외 콘텐츠를 보기가 힘들다는 것? 자막을 읽으려면 영상을 멈춰야 해 보는 시간이 두 배로 들어요. 그래서 최근 영어공부를 시작했어요."

망막색소변성증을 일으키는 유전인자는 밝혀진 것만 200여개에 달하고 다양한 유전자 변이가 발병에 관여합니다. 표적·유전자 치료제를 만들기 어려운 이유죠. 고무적인 사실은 최근 유전자 치료제 개발 기술의 발전으로 전 세계적으로 여러 임상연구가 진행 중인데요. 그 중 하나의 신약이 상용화에 성공했습니다. 노바티스가 개발한 '럭스터나(성분명 보레티진 네파보벡)'가 그 주인공이죠.

럭스터나는 망막 내 주사를 통해 고장난 유전자가 있는 망막세포로 정상 유전자를 전달합니다. 정상 유전자가 정상 단백질을 생성함으로써 세포가 제기능을 할 수 있게끔 하죠. 지난 2021년 삼성서울병원에서 처음으로 럭스터나 투여에 성공한 사례를 발표했는데요, 치료 이전에는 밝기가 150럭스(lux)가 돼야 바닥의 화살표를 따라 걸을 수 있었던 환자가 투여 후 훨씬 낮은 밝기인 10럭스에서도 가능해졌습니다. 150럭스는 맑은 날 해 뜨기 30분 전 정도의 밝기이고, 10럭스는 1m 떨어진 곳에 촛불 한 개를 킨 정도의 밝기이니 치료 효과가 꽤 컸다는 의미죠.

럭스터나 투여 후 개선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
"저처럼 야맹증이 유독 심한 환자에게는 치료 효과가 매우 좋을 거란 기대가 있어요. 시력이 0.3 정도만 돼도 일상을 살아가는데 무리가 없대요. 지금은 먼 거리를 혼자 다니지 못하고 자전거도 타기 힘들지만 나중에 급여가 돼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면 삶의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럭스터나를 모든 망막색소변성증 환자들이 투여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럭스터나는 수많은 망막색소변성증 유전인자 중 RPE65라는 단 하나의 유전자만 타깃하기 때문이에요. 앞서 밝혀진 유전인자가 굉장히 많다고 언급했었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자들이 그만큼 제한적이라는 뜻입니다.

유전자 신약이라 가격도 만만치 않아요. 약 10억원이죠. 아직 급여가 되지 않고 있어서 환자들은 럭스터나를 급여로 맞을 수 있는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급여가 되면 RPE65 변이가 있는 정민 씨가 치료를 받고 원하던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될 지도 모르죠. 또 전 세계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보다 많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광범위한 유전자 치료제나 인공망막 개발에 나서고 있어 언젠가 이 병도 치료 가능한 질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정민 씨와 이야기를 나눈 후 줄곧 맴도는 말이 있는데요. "서울에서도 별이 많이 보이나요?"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치료제 임상을 했는데, 밤에 별을 볼 수 있는 정도가 됐대요. 저는 아직 달밖에 보지 못했거든요. 나중엔 저도 별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정민 씨가 수많은 작은 별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길 바랍니다.

정민 씨가 밤하늘의 별을 마음껏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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