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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민관식, 약업계 큰 발자취 남기고 소천

  • 정웅종
  • 2006-01-16 12:15:20
  • '건배' 제창 역사의 뒤안길로...전현직 임원들 '애도'

민관식 명예회장의 타계직전 모습.
새해마다 약업계 신년교례회장에서 '건배' 제창으로 노익장의 힘(?)을 보여주었던 민관식 명예회장. 이제는 그의 모습을 볼수없게 됐다.

16일 오전 5시경 숙환으로 타계한 민관식 명예회장(89)은 14년간 대한약사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50년 위업을 일군 약사사회에 비쳐진 그의 면면은 대한약사회장직을 떠난지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큰 족적을 남겼다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그 만큼 그는 약계는 물론 사회각계의 대원로 역할을 해왔다.

약사회 전현직회장 "약업계의 큰어른 타계 유감"

민관식 명예회장의 타계소식에 약업계는 "큰 별이 졌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민 명예회장을 '큰 별', '대부' 등으로 표현할 정도로 그의 삶의 궤적은 약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약사회 원희목 회장은 이날 타계소식을 접하고 "신년 인사를 다녀온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이런 소식을 접하게 돼 충격"이라며 "오늘날 약사회의 초석을 다진 분"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민 회장은 연세가 많이 들어서도 늘상 약사회를 챙겼다"면서 "올해 새배를 받는 자리에서도 당신보다는 후배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김명섭 명예회장도 "초창기 입지가 서지 않은 약사회의 위상강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라며 "한마디로 약업계의 기둥이었다"고 표현했다.

김 명예회장은 "정치에 입문해서도 약사의 권익 향상을 위해 대변인 역할을 도맡아왔다" 면서 "약사공론 창간을 주도하는 등 그의 궤적을 한마디로 갈음할 수 없다"고 부연했다.

민 명예회장은 약사회의 정치참여 중요성을 일깨웠다. <출처:대한약사회 50년사>
약사공론창간-회관건립...약사회 위상강화 큰역할

아호 소강(小崗)은 약사사회의 등소평을 연상케 한다. 약사회는 민 명예회장이 일군 업적에 대해 크게 다섯가지로 나누고 있다.

그 첫 번째가 약사공론 창간. “약사공론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약권이 얼마나 위축되었겠어... 정부에 대한 가장 고상한 압력수단은 회원의 여론표출이거든. 정말 기관지 창간은 잘 한 일이라고 자찬하고 싶어” 민 명예회장이 생전에 남긴 말이다.

민 명예회장은 약사회의 정치참여가 왜 중요한지 자각하게 한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70년대 말 신민당이 한의사의 의원입법 요청을 받아 최초 한약파동이 일어나자 당사를 찾아가 한약관련 법안의 상정을 포기하게끔 한 일화는 오늘날도 회자되고 있다.

민 명예회장은 “이 일로 약사사회의 정치참여에 대한 중요성이 자각되는 계기가 됐다”고 평했다.

1978년부터 1981년까지 회관건립 기초를 닦은 일, 1973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부산금정약국 약화사고 처리도 재임기간 중 처리한 일들.

약사보수교육 법제화 일익...전문인 평생교육 강조

특히 1975년 약사보수교육의 처음으로 법제화해 정부의 위탁사업으로 대한약사회가 이를 실시하게 되었다.

민 명예회장은 “약사와 같은 전문직능인이 계속교육과 평생교육을 통해 직능을 고도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난 문교부 장관이란 실질적인 교육정책의 경험을 바탕으로 절감했다”는 그의 말은 지금의 약대6년제와 맥을 같이 한다.

아흔 가까운 고령의 나이에도 테니스와 헬스를 거뜬하게 소화하던 민 명예회장은 한국스포츠계의 대부로도 유명했다.

1964년부터 71년까지 대한체육회 회장직을 역임했고,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 대한올림픽위원장, 동아마라톤 꿈나무재단 이사장 등 타계 직전까지 약사말고도 체육인으로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민 명예회장은 경기고 전신인 경성제일고보 당시 탁구 조선대표를 지냈고, 서울농대 시절에는 테니스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이 같은 스포츠 사랑은 태능선수촌 건립 등 우리 체육사에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한편 원 회장과 김 전 회장 등 약사회 전현직 임직원들은 이날 오후 빈소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고인의 빈소는 삼성의료원 영안실 15호에 안치됐고 5일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민관식 명예회장 그는 누구인가

1918년 5월 3일 경기 개성 출생.

호는 소강(小崗). 1940년 수원농대를, 1942년 일본 교토대학[京都大學] 농예화학과를 졸업했다. 1953~66년 고려시보사장(高麗時報社長)을 지냈으며, 1954년 제3대 민의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 정계에 입문했다. 1957년 중산육영회(重山育英會) 이사장이 되었다.

1958년 제4대 민의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1960년 제5대 민의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63년 교토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4~71년 대한체육회 회장, 1966년 약사회 회장, 1968~71년 한국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 1970년 아세아 약사회 부회장, 1971~74년 문교부장관, 1974년 아세아 정책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문교부장관으로 재임하던 1974년 고등학교 평준화정책을 실시했으며, 미국 핀틀리대학에서 명예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측 부위원장 겸 공동위원장 대리, 같은 해 성균관대학교 이사장, 1974~84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을 지냈고, 1978년 원광대학교에서 명예약학박사학위를, 같은 해 중앙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제10대 국회부의장, 국회의장 직무대리를 지냈다. 1980년 타이완정치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84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명예회장, 1986년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 1987년 동 운영협의회 공동의장, 1989년 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지냈고, 1989년부터 한국 올림픽 위원회 상임고문, 헌정회(憲政會) 고문 등의 직책을 맡고 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 청조근정훈장, 체육훈장 청룡장 등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미국의 입법과정〉·〈왜 그들은 잘사나?〉·〈낙제생〉·〈끝없는 언덕〉·〈한국교육의 개혁과 진로〉·〈낙제생의 글과 그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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